미앤히앤쉬 - 1 -
이야기롬 2008/03/1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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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하동맹
가족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묻고 싶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감정인지 말이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사랑이 어떤 형태인지 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일컬어지는 가족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논의는 내게 있어 방약무도 한 것이다.
둘째형이 첫째형에게 얻어터지는 것을 보는 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못된다. 미스남이 밉살맞게 구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남의 소생들을 보노라면 어이없게 미스남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심지어 재수 없는 셋째형이 건들거리는 동네건달들에게 쥐어 터졌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첫째형 방에 들려 진 일본도를 꺼내들었던 다던가 하는 이런 것들을 통칭하여 준다면 사랑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슬하에 여섯 명의 자식을 두셨다. 살아계신 분을 두고 이런 표현을 하기는 모지락스럽지만 어차피 이집과 옆집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소생들에게 이미 그 양반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일 년 뒤쯤 슬하의 자식이 일곱이 되어있을 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부인은 한명, 애인은 열둘 그 중 네 번째와 열 번째에 나의 어머니와 미스남이 있고, 첫째형과 둘째, 셋째형은 모두 큰어머니의 소생이지만 첫째형은 어찌된 것인지 미스남의 쌍둥이까지 부양의 책임을 지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아버지조차 손을 놓아버린 상황에서 쌍둥이들과 미스남의 거처를 마련해준 것은 첫째형 이였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하는 아버지의 웃는 얼굴만을 빼다 박은 첫째형은 아버지의 기이한 인생여전 중에 한부분을 고스란히 밟아 가고 있는 중 이다. 단아 하고 성실한 얼굴을 가지고 곱디고운 품성을 지닌 사람 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첫째 형의 특기이며, 웃으면서 사람들의 팔을 비틀고 배를 가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유별난 취미이다. 거기에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지는 기특한 습성 중의 하나인 자신에게 연결된 울타리를 지켜내는 것 까지 기묘하게 틀어진 아귀처럼 대체로 일관된 구석이 없다. 첫째형이 일관되게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은 오합지졸로 모였지만 한쪽으로 흐르든 양쪽으로 흐르든 피가 흐르는 형제, 즉 가족뿐이다.
“그 고운 얼굴로 사람을 죽이는 거야. 희번뜩하게 칼춤을 춰가며 말이지. 이녀석들아 어?! 상상해봐 오싹오싹하지 않냐? 아주 그냥 사타구니가 뜨뜬미지근해진다고! 암!”
저기 저 철없는 둘째형은 띠동갑도 한참 아래인 저 쌍둥이들과 어느 날은 철천지원수처럼 어느 날은 둘도 없는 동복형제처럼 화해와 반목을 오가며 정신연령을 맞춰가고 있는 중이다. 사타구니라는 단어를 저 녀석들이 알까마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자니 셋째형처럼 절로 과도로 손이 옮겨진다.
“하지만 아버지 그렇게 사람 좋은 얼굴은 아닌데?”
쌍둥이중 오른쪽에 점이 난 녀석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동의를 구하 듯 왼쪽에 점이 난 놈을 돌아보며 묻는다.
“맞아. 웃을 때 꽤나 비열하다구요.”
헤실거리는 웃음을 거두고 비장한 표정으로 뒤바뀐 왼쪽에 점이 난 놈이 둘째 형을 똑바로 쳐다보며 자랑스럽게 의견을 피력한다. 자신의 눈썰미를 알아봐 달라는 것이다. 단어사용이나 아버지라는 사람의 얼굴을 평가하는 모양새나 가정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무렵 셋째형이 어딘가에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몇초만 더 있으면 출처를 알 수 없는 단도가 튀어나와 둘째형을 겨냥할 것이다. 제발덕분에 이번에는 성공하길 바란다.
“하긴.. 필우형이 아부지를 좀 닮긴 했어도 뭐 본판은 필우형이 더 낫지?”
“둘째형님! 형님은 큰형님 일본도 휘두르는 거 봤어요? 가까이서 본 적 있어요? 난 보고 싶은데 미스남이 못보게해.!!”
“맞어!! 맞어!! 나도 보고 싶어요. 잘생긴 첫째형이 막 휘두르면 대따 멋질 것 같아. 만화에 나오는 무사 같지 않을까? 슉슉~ 캬아-"
술 한배나 돌고 내뱉을 저 의성어를 내뱉는 저 쌍둥이들. 우리집에 가는 길목에 콘크리트 철벽을 쌓겠다는 모성애의 발로가 어서 빨리 발현되기를 바랬다.
“근데 너네들 이러는 거 미스남이 아냐?”
“미스남? 알지 당연히 우리가 누구 아들인데.”
그 와중에 이 녀석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것을 잠시 생각해낸 둘째 형. 조만간 일어날 진정한 의미의 동족상잔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오래전부터 오로지 이것뿐 이였다.
“상우형 간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단도가 소파쿠션에 박혔다. 셋째형의 단도를 피하는 것에는 이미 이력이 나있는 둘째형의 나이스한 액션이 빛을 발하는 순간! 미스남의 소생들은 기립박수를 셋째형이 아닌 둘째형에게 연신 쳐대며 뒷걸음질로 현관문을 나섰다.
“나이스샷.”
“아 썅!! 나가!!!”
어머니 손을 꼭 잡고 대문을 들어선 이래로 보아오던 광경이지만 역시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심지어 셋째형의 단도는 가끔 나를 향해 날아오기도 한다. 둘째 형과 달빛을 아로새기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결과가 지금의 생존을 만들어 냈다. 그것만은 감사해 둘째형!
“여민우! 내가 상우하고 저 쌍둥이들 못 마주치게 하랬지!!!”
“피가 땡긴대.”
“이런! 썅 너도 나가!!!”
복숭아에 박힌 단도를 빼냈다. 나이스 샷! 절로 흥이 나는 감탄사가 아닐 수 없다. 고이 깎아 첫째형이 예뻐하는 노리다케의 플로랄접시에 담아주고 싶지만 셋째형은 그 접시를 보면 기겁을 하고 둘째형은 실실대며 접시를 유리창에 던져버릴테지. 뭐 어쨌든 난 지금 마하를 달려야 한단 말이다!
“그리고 막내! 필우형의 전언이다. 세시에 사무실로”
둘째형에게 헤드락을 걸어 마루를 한 바퀴 돌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태연하게 첫째형의 메시지를 전한다. 아까 미스남의 소생들이 현관문을 따고 쳐들어왔을 때 학교로 도망쳤어야 했다. 그나저나 저 쌍둥이들을 동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면서 왜 난 아직도 막내인가!
“나 학회모임 있는데.”
“빠져”
“안돼. 발표모임이야.”
“그럼 상우형 보낸다.”
“아악!!!!!!!!”
상우형!! 상우형!! 이 망할 상우형!! 이라는 작자는 셋째형에게 헤드락이 걸린 채 콜록거리고 있는 칠칠치 못한 이십대 중반의 반백수이다. 되는 일도, 하는 일도 없으면서 주색잡기, 낭비하기, 얻어터지기가 주특기인 이 사람이 형의 사무실에 가면 나와 셋째형은 그 아마 석달열흘동안 첫째형 사무실을 드나들며 뒤치닥거리를 해야할지도 모른다. 2년 전 주류유통어음부도 사건의 주범이자 배후인 둘째형이 잡히기까지는 꼬박 2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후유증은 그 몇 배에 달해 첫째형은 나이트를 하나 넘겼고, 건물 하나를 경매로 팔아치우기 까지 했다. 그래서 왠만하면 첫째형도 셋째형도 그저 둘째형이 아무일도 하지 않고 사고만 치지 않길 바라고 있지만.
이 집에서 유일하게 가족이라는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은 모든 관계의 핵심인 아버지 뿐 이다. 아버지는 이 모든 관계의 신처럼 그저 관망하며 의지를 묻는다. 자유롭게 보이는 그 의지는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도, 형들과 어머니가 다른 것도, 그 때의 편린이 지금 이 순간까지 나를 붙잡고 있는 것도 내가 선택한 듯 보이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의지를 의지로 만들어내는 이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내 의지는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뿐이다. 이들의 평온한 일상이 어떤 식으로 산산이 부서지게 될지를 가늠하는 것이 싫다. 시시콜콜하고 난잡한 이 일상을 평정해버릴 이유 없는 전쟁과 그 전쟁의 선봉에 서있는 자들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이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첫째형이 필사적으로 만들고 있는 평범이라는 허울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것을 알고 있다. 질척거리는 이 굴레에서, 누군가의 부러진 팔로 어떤 가난한 자의 굽신거림으로 만들어낸 피비린내 나는 이 부 안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그 것을. 모두 알고 있었겠지만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나뿐으로 첫째형이 내게 자신의 뒤를 종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이다. 비록 그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전부터 오로지 피하는 것 뿐 이였을 텐데 정말로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나의 선택은 모두에게 옳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같은 것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30년 동안 누구의 손길도 거쳐 간 적이 없는 붉은 벽돌 사무실의 나무계단에서는 시큼한 세월의 냄새가 난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채 조심스럽지만 황망하게 뛰어오르듯 오르던 그 계단. 아마 모든 시작은 이 계단에서 부터였을 것이다. 사무실 안은 한적했다. 10년 동안 미스남이 앉아있던 캐비넷 옆의 찌그러진 철제책상에는 저주받을 동안계의 지존이 앉아있었다. 형님대신 이 인간이 앉아있는 줄 알았다면 첫째형한테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학교로 가야 했다.
“형님 지금 안 계시는 데? 십분 늦었네 막내?!”
목소리마저 간드러져 듣고 있기가 고약스런 저 인간은 무늬 없는 흰색티셔츠와 찢어진 청바지로 이제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소년 같은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진정 저주받을 지어다!!! 서른이라는 나이를 어디로 쳐드신 건지 뽀얀 피부에는 잡티도 없다. 젊은 처녀들의 피로 목욕재개를 서슴지 않았다는 유럽의 어느 여인네처럼 하얗고 뽀얀 피부가 현실감이 없어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내 옆에 앉아 허벅지를 쓰다듬고 있다.
“우리 막내.. 형님이 부탁할 거 있다고 하시던데?”
“신경 끄시죠.”
“나는 알지?! 알려줄까?”
정조관념 제로의 개망나니 보디가드가 형님의 막내동생에 추파를 던지고 있습니다. 어디계십니까?! 큰 형님!! 젠장! 어린아이 구슬리는 듯한 특유의 말투에 괜히 짜증이 몰려와 한대 때려줄까 손을 움찔거렸지만 이 사람의 공인무술 합계가 360단이라는 이 어이없는 농담 속에 담긴 웃지 못 할 진실을 간과할 수가 없어 허벅지 위로 원을 그려대고 있는 손가락을 잡아채 그의 무릎에 다소곳이 올려놓았다.
“그 손 좀! 떼시고 저쪽으로 가셔서 좀! 앉아계시면 안 되시는 지 좀! 여쭙고 싶습니다만.”
최대한 예의바르게 비웃는 양으로 물어보지만 이미 눈이 웃고 있는 지라 전세를 역전하기는 글러먹었다.
“막내 학교에 황도연이라는 사람 있지?”
“학우가 2만이 넘는데 제가 어찌 그 사... ?”
“우리막내가 무슨 과더라. 아 그래 올해 4학년이여야 할 텐데 나이가 좀 많고, 얼마 전에 지리산에서 덜미가 잡힌 사람인데.”
지리산에서 주역을 공부하겠다고 떠났다 한 달여 만에 상거지가 되어 돌아 온 같은 과 선배의 이름이 황도연이다. 게다가 보통의 4학년들보다 나이가 많고, 자급자족의 능력이 전혀 없는 민폐의 전형이자 월메이드급 빈대로 분류되는 예비역 중에서도 특등급인 그 선배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설마 진리를 찾아내 하산한게 아니라 도운네금융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 내려온 것이란 말이냐! 연호는 구석에 붙어있는 금고에서 서류를 하나 찾아 들이 밀었다.
“형님이 네 선배라고 ... 우리 막내 더러 손좀 쓰라던데?”
“... ...”
“난 서류 전해줬다. 그런데 막내! 살 좀 쩌야겠어? 허벅지가 그게 뭐니? 난 단단한 허벅지가 좋단 말야!”
남의 허벅지에 관심은...뭐? 뭐라고? ..날 더러 도연선배에게서 뭘 받아내라고?
"무슨 말......”
“맞다. 막내! 오늘 학회모임 있다며? 학교 가서 열어봐도 늦지 않아.”
둘째형한테 헤드락을 걸면서 전화질까지 하신건가. 셋째형은 착실하기도 하다.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내가 바쁘다고 미리 언질을 놓은 모양이지만 지금은 학회가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날 더러 뭘 하라는 것인가 도대체. 그저 얌전하게 살고 싶은 나다. 야금야금 본성을 바꿔가고 있는 중이다. 열심히 모로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나에게 지금 학교선배의 사채 빚을 받아내라는 것인가!
“받아야 할 돈이면 받으세요. 그럼 전 이만”
“인망이 두터운 팔자인데 주변에 사람이 없네? 인재로 죽을 상 이야. 좀 위험하지...? 네가 받아낸다고 한다면 한 달의 기한이 석달로 늘어나는 정도의 예우가 발휘되지 않을까? 막내의 막역한 학우로서 말이야.”
모든 말꼬리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다는 투로 한 옥타브를 높이는 것은 연호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상대의 의중을 묻는 것 같은 친절함이 배어나와 건너편 사람의 긴장을 풀어버리는 데에는 즉효이지만 오늘 만큼은 전혀 매력적이지 못하다. 특히나 나는 그 약발에 면역 된지 오래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네가 받아내라고 석 달 내로. 어떻게든.”
“받아내면요?”
“석 달 이후로도 네 선배의 목숨이 붙어있게 되는 정도..?!.”
“못 받으면요?”
“못 받을 것 같으면 다음 주까지 잘해줘. 먹고 싶다는 것도 사주고, 여자도 소개시켜주고, 마지막 가는 길 고이 보내드려야지”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재차 주머니 안에서 다잡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채로 돌아갈 수 있지만 이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학교 선배다. 아니 학교 선배일 뿐만 아니라 그 민폐의 전형인 선배는 사람 곁에 빙빙 돌던 나를 사람 안으로 들이 밀어준 은인과 같다. 하필이면 그런 은인이 월메이드급 빈대라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그런 그를 지금 나의 가족이 고이 극락으로 보내드리겠다고 언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망할 인간은 돈도 없으면서 도대체 사채를 어디다 썼단 말인가!! 하긴 그 양반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자취방 전세금을 빼서 여자친구에게 홀라당 쏟아 부은 지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았다. 개뿔 주역은 무슨! 그 충격으로 지리산에 들어갔다 하산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돌아다녔던거냐!! 아니 그 사람의 무엇을 보고 돈을 빌려주는 거지? 아무리 막 나가는 사채업자라지만 최소한 갚을 사람을 봐가며 빌려줘야 하지 않겠는 가 말이지! 젠장!!!
연호의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낚아채듯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이 빌어먹을 곳에 다시 발걸음을 하게 되다니. 에라!! 한껏 울궈낸 가래를 뱉어내려던 찰나 ...
“막내 왔네?”
상냥한 첫째형의 목소리에 놀라 다시 삼켜버리고 말았다. 찝찝하기 까지 한 금요일 오후. 은회색의 단정한 양복차림과 검정색 뿔테안경이 법조계인사나 대기업사원이 인 것처럼 퍽이나 잘 어울린다. 저토록 단정하고, 환한 웃음이라니. 저 부드러운 목소리와 사람 좋은 웃음은 어디까지나 위장이란 말이지. 피갑칠을 하면서도 저 미소를 잃지 않는 다는 데서 이미 첫째형은 보통사람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하긴 그걸로 따지면 내 위로 삼형제가 서로들 못지않다. 가족이 생겼다는 기쁨이 이렇게 신랄한 배신으로 돌아올 줄이야. 빨리 피하는 것만이 상책이다 아무쪼록.
“그래 학교는 언제까지 다닐 거야?”
학교에 뼈를 묻을 생각입니다!! 왼쪽 눈썹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학회에서 유물론에 관련된 기조문을 발표해야 하는 것만으로도 편두통이 도지는 통에 나의 친애하는 형님께서는 자퇴시기를 묻고 있다. 덧붙여 막역한 학우로부터 사채빚까지 받아내라는 명령까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듯 하달하면서 말이다. 찝찝함도 모자라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금요일 오후. 역시 아까 그 망할 쌍둥이녀석들이 들이닥쳤을 때 나는 학교로 내뺐어야 했다!
“아직 흥미가 있어? 생각보다 오래 다니는 군. 아 오해하지는 마. 돈 때문은 아니니까.”
스멀스멀 내 얼굴을 만지작대는 첫째형의 손을 어떻게 떼어낼 까 고민하다 그래도 꼭 물어야 할 것 같아 형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이 서류 ... ”
“아.. 이미 받았구나. 석 달이야. 지금부터 석 달 뒤 세시 사십삼분 안에 가지고 와야 해. 알지?”
“만약 내가 이걸 받아오면요.”
“글쎄 보통들은 다시 그들만의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그럼 나는요”
“넌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거고.”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을 주었다고 하지만 자유의지라는 것은 자연의 시스템 안에서는 이미 쓸모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딪히는 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신을 믿지도 않고, 나를 믿지도 않는다. 선택에 의지가 있다는 것 또한, 내게는 해당사항 없는 내용이다.
“돌아가지 않아요.”
“...”
“돈은 받도록 노력해 볼께요. 하지만 난 돌아가지 않아요.”
“아무래도 좋아. 네가 그 돈을 받을 수 있게 될 때쯤에는 네 생각이 좀 달라져 있을 지도 모르지. 다시 여기서 날 마주하지 않으려면 석 달 동안 이 서류 안에 담긴 일을 어떤 식으로 풀어내야 할 지 잘 생각해봐. 시간은 길면서도 짧지. 모든 사실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말이야. 인과관계를 따져 물어봤자 남는 건 결국 ... 뭐가 있을까? 여민우?”
인과관계를 따져 물어 남는 게 무엇인가? 후회? 원인과 결과를 알아 사태를 해결한 뒤에는 언제나 후회만이 남을 뿐이지만 이런 간단한 공식에 뜬금없는 선문답을 제시했을 리는 없다. 아니 사실은 전혀 생각 없는 물음이었을 지도 모른다. 첫째형의 저 낯짝은 아무렇게나 던진 말에도 심오한 해석을 달아 되돌아오니 말이다. 단무지를 다시 가지러간 중국집 달선이의 뒷통수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자는 언제나 뒤를 조심해야하지” 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속삭이는 통에 달선이가 한동안 정신과치료를 받았다는 소문의 한가운데에 있는 자가 바로 첫째형이다.
아무리 이 서류를 면밀히 들여다본다 한들 그가 원하는 결론은 없을 것이다. 기껏 해야 서류에 담긴 것이 알량한 차용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결코 그 때와 같은 선택을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형과 나는 독립된 개체다. 우리는 분명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 묶여있지만 도운네금융의 업무는 전혀 별개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첫째형과 가족이라고 해서 도연선배의 빚이 탕감되거나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기한이 약간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이자는 여전히 몸을 불리고 있을 것이고, 나는 선배에게 돈을 받아내야 할 것이다.
젠장! 어쨌든! 기조문을 발표하려면 이제 삼십분이 남았다. 몇 장되지도 않는 기조문을 복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지만 고객서비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복사집의 행태에 분개에 분노를 더하던 찰나 귀를 찢는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지 한참을 난감하게 두리번 거리고 있자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여민우!”
도운네금융의 채무자이자 난데없고도 쓸데없는 고민꺼리를 한보따리 던져놓은 문제의 도연선배가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으로 외제승용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선배를 보자 갑자기 불끈불끈 뜨거운 것이 밀려올라오고 있었다. 무려 외제차에서 내린 것이다. 저 남자가! 사채빚 때문에 석달 뒤 꼬옥 이 시간에 비명횡사할 팔자의 저 남자가 지금 외제차에서 내려서며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손에 들린 기조문을 내팽개친 채 부지불식간에 달려들어 선배를 끌어냈다.
“우리 이야기좀 할까 선배?! 어?!!”
사이좋은 선후배마냥 한손은 어깨에 두르고 나머지 손은 멱살을 살며시 그러쥐고서 본관 옆에 덩그러니 놓인 전화박스로 밀어넣었다.
“아이 이러지마.”
자못 부끄러운 듯 잡혀진 멱살위의 손을 쓰다듬으려 게슴츠레 눈을 뜬 도연선배.
“지금 장난이 나와? 어?!"
“자기 그럼 나 너무 무섭더라.”
“사태파악 안되지 지금?!”
“이런식의 고백은 난 사절이야.”
“허..허허.. ..헉!”
숫제 웃음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여전히 추레한 얼굴과 행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지긋이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는 선배앞에 노란봉투를 들이밀었다.
“이거.. 뭔지 알아?”
“뭐야? 돈이야? 어머. 자기는 그렇더라. 나 돈 필요한데 어떻게 알았어?!”
“커헉! 형!! 나 지금 장난 아냐!”
“그 자식들 왔다 갔구나.”
간만에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며 잡힌 멱살을 풀어내었다. 금새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로 측은지심을 유발하려는 모양이지만 이것도 약발 떨어진지 오래다!
“선배 어쩌자고 사채빚을 끌어다 쓴거야!!! 도대체!!! 어디다 썼어?!! 선영이? 선영이한테 퍼부은 돈은 집세라며? 뭐야 어떻게 된거야?!"
"쳇.. 학교까지 찾아왔던거냐?"
"그게 아니.. 어? ...어.. 어!! 어! 그래!! 학교까지 찾아왔더라니까 그 자식들이!! 그 자식들 내 얼굴도 알아놨는데!! 어떻게 할꺼야?!"
특유의 통달한듯 사려깊은 미소로 돌아간 선배는 축 처진 어깨를 하고는 생각에 잠겼다. 뭐라고 해야 좋을 것이냐. 그 사채업자들은 나의 가족이며, 나는 선배의 명줄을 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젠장! 그래! 선배는 돈을 갚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 한다. 어쩌면 선배가 돈을 갚게 되면 나는 정말 저들의 곁에서 완벽하게 떠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 첫째형이 원하는 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부딪혀서 이겨내라는 것인가. 아주 잠깐 깨달음의 순간이 도래한 듯 했지만 시야에 그림자가 지는 것과 동시에 빛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아아..이봐 조금만 더 기다려.
"무슨일이야?"
선배와 내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예의바르게 시니컬하다는 총평안에 잘 생기고 친절한 부잣집 아들이라는 포스를 곁들인 그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군대에서 전역한지 이제 겨우 한달이 지났을 뿐인데도 그는 꽤나 세련된 민간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원래부터 옷은 잘 입는 사람이였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지만 약간 붉게 그을렸던 얼굴이 한달도 채 걸리지 않은 시간안에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여자선배들은 무슨 화장품을 갖다 발랐기에 해사한 피부 그대로 되돌아왔는 지 피부의 비결을 물었고, 남자선배들은 그의 밤톨같은 머리모양에 소리를 질러대는 여자후배들을 좌시하며 미용실 위치를 물었다. 친절하게 묻는 말에 답을 해주었지만 물어봤던 사람마다 뒤로 넘어가는 것을 목도하며 과실을 나섰던 나로서는 눈앞에 앉아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그가 볼 때마다 신기했다. 저 사람은 어쩌다 도연선배와 친하게 된걸까. 하긴 내가 도연선배와 친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보자면 퍽 신기한 일은 아닐 법도 하지만.
"후룹!"
진득하게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탐하며 숫제 쥬스처럼 파르페를 둘러마시는 도연선배와 그런 선배를 애정이 충만한 미소로 바라보는 그. 다른때라면 그냥 한마디하고 말았을테지만 유난히 정갈해보이는 그의 옆에 앉혀놓으니 가관이었다.
"그만 좀 드쇼. 거지가 들어앉았나."
"냅두쇼. 후배님. 지가 사는 것도 아니면서."
"어휴!!"
파안대소보다 훨씬 더 상대편을 기분좋게 하는 웃음. 그는 서로에게 눈을 부라리고 입을 움찔거리는 선배와 나를 보며 입꼬리만 슬쩍 올려 웃었다. 정말 즐거운 듯 웃는 그의 소박한 미소와 마주치자 갖은 욕을 버무리던 입이 순간 정지된 것처럼 앙당물어졌다.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져 보지만 곁눈질로 나는 그를 훔쳐보았다.
해가 뉘엇거리는 후문거리는 수업이 끝난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카페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거리를 바라보니 지금 내가 어디에 앉아있는 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십년 하고 4개월째 접어드는 짧지 않는 생애 내내 남자들하고만 카페를 가보게 된게 이번이 세번째다. 그때마다 이 멤버였다는 것이고 그 세번이 모두 그를 만나 횟수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주로 나는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다가 도연선배에게 감질나는 대꾸를 해대고, 나보다 더 조용히 선배의 말을 들어주는 그는 느긋하게 소파 깊숙이 몸을 뉘었다. 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정도로 푹신하게 기댄 그와 도연선배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들썩이는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세시간동안이나 카페에 앉아있었다.
설마 오늘도 세시간이나 버틸 생각은 아니겠지?!!!!
제발 이제 그만 나가자는 말을 하려던 찰나 주머니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아!! 상철이!!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외제차에서 내린 선배를 보고 퓨즈가 나가버린 그때 그리고 세번째로 그를 보게 된 것을 상기하면서부터는 학회, 기조문, 발표 이런 단어들이 저기 저 너머로 달아나버렸다.
"아 젠장! 상철이다!"
진동으로 바꿔놓은 핸드폰의 울림은 점점 분노의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물론 정확하게 상철이인지 아닌지는 받아봐야 아는 것이겠지만 이 시간에 이렇듯 필이 충만한 분노의 진동을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단연 상철이 밖에 없을 것이다. 다혈질인 학회장 상철이가 이번 주의 발표자이며 동시에 4주내내 미루고 미루어 급기야 OB들로부터 학회를 없앨모양이냐는 진심어린 주먹질의 현장을 만들어낸 이 내가 학교 후문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걸 안다면 저 산 꼭대기 학회방에서 득달같이 달려 내려올 것은 자명한 일 한참 동안 울려대는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내가 받아주랴?"
슬며시 핸드폰에 손을 내미는 도연선배의 손을 가차없이 쳐내며 받지마라고 소리쳤지만 아까 게걸스럽게 파르페를 훑어먹던 왼손으로 핸드폰을 잡아 뺐다. 이럴때는 또 순발력이 엘리트다!
"여보세요? 상철이냐?"
"아 진짜! 끊어.. 끊어! 끊어 선배.. 얼른."
차마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몸까지 낮추며 애절한 표정을 짓던 내게 선배는 훗 하며 웃어보였다.
"어. 지금? 민우 커피마시고 있는데."
커헉-!!!!!
-아 씨팔새끼. ..... 형..... 아웃이......내가.. 알았.....
선배가 핸드폰에서 얼굴을 뗄 때마다 상철이가 지르는 소리에서 딱히 조합을 하지 않아도 문장이 연상되는 단어들이 새어나왔다. 그 소리들을 모아 의미를 도출해보자면 이제 나는 학회사람들과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것인가?! 저 망할 선배라는 화상때문에 안녕이다! 안녕?! 저인간과 엮이면서 부터는 반가움의 안녕보다는 분노와 안타까움의 안녕만이 넘실거리게 됐다. 상철아! 미안하다!
"형 그만해요. 민우 얼굴 봐봐."
"괜찮아. 너도 봤지 아까? 저 쉑이 하늘같은 선배한테 하는 배은망덕한 행동거지를!!!"
저인간이 인간관계에 가위질까지 하고서는 미안한줄 모르고! 선배만 아니면 확! 하는 생각이 아니 든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상철이가 더이상 OB선배들에게 굽신거리며 나를 변명하지 않아도 좋을 테니까.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지만 상철이가 퍽이나 곤욕스러워했던 것도 알고 있었고, 선배들에게서 학회에서 탈퇴시키는 게 어떻겠냐는 극단의 성토를 막아내는 덕에 수중의 돈을 매번 술자리에 갖다 붓고 있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왜 그토록 상철이가 나에게 보통의 관계를 만들어주고 싶어하는 지는 모르는 체 하고 싶지만 그만하면 상철이 나름대로의 도리는 다 한것이다. 내가 알아주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상철이에게 양신 얻어터져야겠지만.
"... 상철이 한테는 내가 이야기해둘께."
조용히 차를 마시던 그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위로했다. 어이없는 웃음이 흐르면서 도연선배의 멱살을 향하던 손이 멈췄다. 어떻게 말을 할 것인가. 그대나 나나 밖으로만 배회하기는 마찬가지일터인데.
"상철이가 문제는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 그렇담 강수한테 이야기해도 되고."
"강수선배랑 친하십니까?"
"아니."
헉 - 저 대책없는 뉘앙스 좀 보라지요. 의외의 모습이지만 도연선배와 죽이 잘 맞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이 자식이 아까부터?!! 그러게 알지도 못하는 사회과학분과는 들어가서 생고생이냐?"
"잔디밭에서 점치는 선배보다야 낫지."
"이놈시키?!"
딱! 숟가락을 들어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삐쩍마른 주제에 아귀힘은 장사다. 과연 스냅샷의 일인자!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주역이다! 우주의 신비.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주역을 그리 말하는 자! 벼락맞을테냐?!"
"아놔. 암튼! 이게 다 형때문이잖아!!"
"이건 나 때문도 아냐. 이 자식아. 넌 언젠가 강수든 형일이든 병문이든 셋 중 한놈한테 얻어터지고 쫓겨났을 것이야.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나한테 쌍심지를 켜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 위의 세사람 뿐이던가. 하이데거와 하버마스가 독일맥주상표고 촘스키가 스키브랜드인줄 알았던 내게 칼을 갈고 있던 사람은 비단 학회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사회과학학회는 사회학계열의 논문을 쓰거나 독일로 사회학연구분야의 유학을 가기 위해서는 필수코스였다. 입부부터가 여타의 학회처럼 즐기면서 배우는 상큼한 대학생활이 아니라 말그대로 상아탑으로서의 본질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목표인 이상 학회에 들어가면 독일유학은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사회학계열 동아리로는 유일하게 타과에서도 입부하려 드는 자들이 넘쳐나니 아카데믹한 생활을 영위하지 않고도 학회에 빌붙어있는 나를 아니꼽게 보는 눈은 우리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철이의 간곡한 부탁에 넘어가긴 했지만 섣부르고 즉흥적인 선택치고는 꽤나 난이도 높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 같다.
진짜로 계약서를 작성해 왔다. 그것도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해준다는 변호사에게 공증을 받아가지고 왔다. 액수는 당초 도연선배에게 빌려주기로 했던 액수보다 공이 하나 더 붙어있었다. 다물어지지 못한 입에서 담배가 떨어졌다. 설마 계약서를, 그것도 공증받은 계약서를 가지고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믿지 못하겠다면 다시 변호사를 불러 계약서를 처음부터 다시 작성할 수도 있다고 했다.
“돈... 제가 빌리는 거 아닌데요.”
아닌 말로 도연선배에게 고마운 마음이야 하해와 같지만서도 빚까지 함께 짊어질 만큼은 앞으로도 뒤로도 돈독해지지 않을 예정이다. 게다가 무슨 후환이 있을지 모를 계약을 그것도 돈에 관련된 계약을 내 이름으로 작성한단 말이냐고. 듣고, 보고, 자란게 사채다. 빚이라는 것이 어떤 괴물인지 능히 알고 있는데.
“우선 읽어볼래?”
천진스러운 얼굴로 환하게 웃는 낯짝을 보니 이건 댓거리 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돈 제가 빌리는 거 아니라니까요.”
“빌려주는 거 아냐. 그러니까 빚도 아니지.”
헉. 그럼 공짜로 주는 돈이란 말인가. 테이블에 놓인 계약서를 냉큼 집어들었다. 차용에 관련된 내용을 찾았지만 그런 말은 없었다. 용역계약서와도 비슷한 것이 날짜가 적혀있었고, 거기에는 달성해야할 목표 같은 것도 있었다. 목표? 애희? 애희누나?
“내가 필요해.”
“네?”
“내가 필요해서 그래. 네가.”
미간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밑도 끝도 없는 이 소리는 또 무슨.
“내 여자친구를 사랑해줘.”
삼단같은 머릿결을 휘날리며 도도하게 걷는 걸음걸이만으로도 후배들의 심장을 들었다놨다 한다는 그녀가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었다.
쿡- 쿡-
아까부터 그녀 앞에 등장할 때가 됐다고 쿡쿡 등을 쑤셔대는 이 남자는 그녀의 남자친구이다. 게다가 이 남자와 그녀는 과에서 유명한 커플로 군대가기 전 과 축제에서 베스트커플상에 선정되어 낙지가 문어를 얽듯 심신이 서로에게 파고들어가 교수님이 차마 더 이상 두눈뜨고 보기 힘들다며 막거리를 사발로 집어던졌다는 전무후무한 희대의 키스사건을 그저그런 에피소드로 가지고 있다. 그뿐이랴. 그녀에게 들이댔던 수많은 선배와 동기와 후배들에게서 선사받은 수차례의 살기어린 장난이 군대에서 그토록 도움이 될 줄은 당하는 동안에는 미처 몰랐었다며 심심한 고마움을 표시하기까지 했었고, 그 또한 단과대학 아니 온 학교내에서 친절하고 사려깊으면서 동시에 잘생기고 집도 유복하다는 왕자님의 삼박자를 고루 갖춰주시니 자기과의 선배와 후배 동기를 넘고 넘어 3층 단과대도서관부터 1층 전화부스 입구까지 그를 훔쳐보려 모여든 여인네들이 줄을 섰으니, 그녀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그 앞에서 그녀의 이마에 베이비키스를 날리는 만행을 일삼다가 몇몇 처자들이 교내버스로 5분거리에 있는 의대 응급실로 실려가는 일이 몇 차례. 아무튼 열거하자면 끝도 없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커플인 것이다. 무려 남자친구가 군대갔다오는 것을 기다려 복학하는 센스를 발휘하며 수절녀의 이미지메이킹까지 완성시킨 그 커플 중! 한명이 내건 계약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사랑해달라니!
“아 좀 기다려봐요. 알았다니까요. 알았어!”
“지금이야! 나갓!”
퍽-
그가 엉덩이를 발로 차버리는 통에 냅다 그녀 앞으로 넘어져버린 나는 본의아니게도 그녀 치마속을 훔쳐보려는 파렴치한이 되기 일보직전이다.
“어 민우야 괜찮아?!”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의 그녀는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봤다. 흘러내리는 결이 고운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며 넘어진 내게 손을 내미는 그녀. 아름다운 그녀!
“아.. 누나.. 안녕하세요. 저.. 오해는 마시길 바.. 쿨럭.쿨럭..”
“오해?”
"아 저 그게요. 누나 저 오늘 시간.."
"시간?"
잽싸게 몸을 일으켜 그녀를 향해 필사적으로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임무를 수행중인데 저 너머로 눈이 모로 찢어진 몇몇 동기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 아냐.. 그런게 아니라니까!
“아 미친새끼 이거 변태 아냐?!”
“누나 괜찮으세요?!”
“애희누나!!! 여민우 너 이자식!”
“선배!! 어떻게”
돌비입체서라운드가 도입되었다고 영화관이 자랑하던게 언제 였지. 멀티플렉스가 생기기도 한참 전이지만 이 녀석들의 스테레오급 단발마에는 내성이 생겨나질 않는다. 가득이나 부자연스러운 얼굴을 들이밀며 그녀에게 말을 붙여볼 요량으로 버벅거리고 있는데 득달같이 달려든 동기녀석들 덕분에 이건 뭐. 뒷통수에 서너대의 애정이 담긴 스냅샷이 달려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애희누나와 동기녀석들은 벌써 계단을 한참도 더 오르고 있었다. 애희누나는 녀석들 틈에서 나를 내려다봤지만 나는 가벽게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오늘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젠장!
머슥해진 나머지 얼얼한 뒷통수를 손에 대고 긁적거리고 있는 데 어디선가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참에 쭈그리고 숨어있던 그가 벌떡일어나서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주며 이번에 그녀를 놓친 것은 결단코 나의 의지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차키를 던졌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저.. 지금부터 수업인데요!
그는 운전면허증이 없다. 그런데 차는 있다. 하지만 운전을 못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왜 내가 지금 여기서 좋아하지도 않는 아구찜을 께작대고 있냐는 것이다. 8만원짜리 수업시간을 날려보낸 것도 모자라 두시간여 동안 기사노릇까지 하면서 받은 댓가로 말이다.
"진짜 없어요?"
"어"
"... 선배. 두시간 운전하는 게 대숩니까?! 네?! 아니 뭐 수업.. 아썅 내 피같....아니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수업 잘 안들어가요. 이해합니다! 다 이해해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 진짜 운전 못해요?"
"어"
입술을 모아 뜨거운 김을 몰아대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있었다. 콩나물이 가득 섞어담긴 접시를 앞에 밀어두고는 방긋 웃기까지 했다. 저렇게 풀어서 물어봐주는 데도 돌아오는 대답은 고작 한마디! 뒷목잡고 넘어가던 선배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이거 싫어해?"
"네"
"그렇구나."
그렇구나?! 아니 그러고 마는 거야?! 미안하다던가 다른 걸 먹을 껄 그랬다던가! 하는 그런 배려의 언사라도 좀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어 한숨을 푹푹 쉬어봐도 도대체 아는 지 모르는 지 두손가득 양념을 묻혀가며 맛있게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다섯손가락 가득 양념을 묻히고, 그것도 모자라 묻는 족족 빨면서 입술을 달큰하게 혀로 핥고 쉴새없이 젓가락질을 겸하며 이따금 소주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참 잘도 드십니다."
참 혼자서 잘도 쳐드십니다의 의미에 살짝 예의를 얹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긴 애초에 같이 밥을 먹는 다는 의미가 이사람에게는 없었다. 밥이나 먹으러가자는 의미였지 함께 밥을 먹자는 의미가 아니였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애희누나는 나와는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인가. 하긴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왠지 그에게 특별한 사람, 예를 들어 함께 밥을 먹는 다는 의미를 좀더 공고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애희누나는 애인이니 우선 패스.
두리번거리는 그가 닦을 것을 찾고 있는 것 같아 화장지를 몇장 뽑아 물을 묻혀 건네주었다. 물수건은 아니지만 물수건처럼 사용하라는 의미가 담긴 행동이였지만 한손에는 아구 다른 한손에는 건네받은 젖은 화장지를 들고서 빤히 쳐다보는 그를 보자니 행동에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냐. 그.. 닦으라구요. 좀."
"...어."
빤히 쳐다보던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건네받은 화장지로 닦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쫙 벌려서 손가락 사이사이까지 닦아내고 있는 그는 웃긴 이야기지만 가끔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다. 중고등학교를 친구들과 함께 다니지 못하고 초등학교에서 훌쩍 대학교로 건너와버린 사람처럼 어리숙하고 우스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보통으로 존재하는 관계의 방식이 애초 필요치 않아 보인다.
잘생긴 얼굴과 아름다운 여자친구 풍족한 집안사정과 친절하고 배려있는 행동 어느 것에도 부족함이 없지만 그는 참으로 이상하게 존재감이 없다. 학과 사람들은 그를 경원시 하지도 경외시 하지도 않았다. 그는 거기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 물론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보다 한 열다섯배정도는 타인이 건네는 더 관심의 퍼센티지가 높은 것 같았지만 그는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선연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그 관심이라는 것도 누구하나 콕집어 설명하지 못한다. 간단하게 그를 좋아한다라는 말 자체를 모두가 아끼는 것이다. 그를 아낀다는 학회선배들도 유독 그가 잘 따르는 도연형도 그리고 근자에 들어 철썩같이 붙어다니며 쓸데없는 소모전중인 나도.
유일하게 그에게 관계를 거론할 수 있는 있다면 그가 날더러 사랑해달라고 하는 여자친구 애희누나 뿐일텐데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애희누나가 아닐까 그런데 왜 날더러 자신의 여자친구를 사랑해 달라고 했을까.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하다고 저사람은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게 맛있어요?"
"아니."
"맛.. 없어요?"
"아니."
"아! 왜 먹어요 그럼!"
"난 맛 잘 몰라. 대개는 맛있고 대체로 먹을만 해."
그의 평소 행동을 보면 이해가 아주 안가는 대답도 아니지만 .... 맛있지도 않은 걸 아니 아주 좋아하는 것도 아닌 음식을 저렇게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대며 먹었단 말입니까! 지금?!
"그런데 왜 그렇게 잘 먹어요?"
"그런가. 넌 안먹어?"
"싫어한다니까요."
"아"
아? 아?!! 아?!!!!!
"근데 싫어하면 보통 잘 안먹나?"
"보통 안 먹죠."
"그렇군."
또 또 또! 저렇게 혼자서 대화를 마무리한다. 그렇군 다음에 무슨 말이 필요한지 모르는 건가. 아!와 그렇군! 다음에 입발린 소리라도 네가 좋아하는 걸 먹을 껄 그랬다는 말정도는 나와 줘야 말이지!
"가자."
손가락을 다 닦아내는 듯 싶더니 물을 한잔 들이키고 상위에 놓인 차키를 또 내게 던졌다.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두손으로 나이스캐취를 하는 나는 또 뭐냐고. 가게문을 나서며 오토락을 눌렀을 때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애희가 좋아해. 아구. 기억해둬."
말의 앞뒤가 장황하진 않지만 순서는 분명 잘못되어있다.
자신의 사채빚이 해결된지도 모른 채 쇠잔해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도연형은 세상 못볼 것을 보고있다는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너희둘이 요새 무슨 작당을 하고 다니는 거냐!"
스냅샷의 일인자가 쇠잔해진 팔목을 어렵사리 들어보이더니 벌처럼 뒷통수에 손바닥을 내리꽂았다. 컵에 이빨을 부딪히며 물을 뿜어버린 나를 쳐다도 보지 않고 추궁한다.
"아 머리 좀!!"
"됐고 말해봐. 뭐하고 다니는 거냐? 요즘 너네 둘이 붙어다닌다고 과실에 핑크빛 소문이 돌고 있어. 아주 사람들이 민우 너를 죽여잡수실라구 벼르고 있다."
이해는 간다. 학과의 마돈나에게 대놓고 집적거리고 있는 이 나에게 칼품지 않은 자 그 누구더뇨! 기꺼이 맞아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어쨌든 받은 만큼은 확실하게 하리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뒷통수에 스냅샷을 날리고 나를 갈구는 그대 언젠간 내앞에 엎드려 빌.........
"아주 핑크빛 소문이 어?! 나참."
잠깐. 이 대화는 이상하다. 왜냐?! 내가 변태처럼 추근대고 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그의 그녀이기 때문이다.
"잠깐. 핑크빛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야?"
"이자식이 힘없어 죽겠는데 말귀를 못알아먹어 왜에~!"
"아니 그러니까 핑크빛 소문의 주인공이 나하고 애희누나 아냐?"
"미친 너랑 원이 이야기하는 데 거기서 애희가 왜 나와!"
그와 나는 동시에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술을 뿜었다. 도연선배 미안!
"아 디러!!!!!!!"
"우하하하하 진짜? 나랑 민우랑? 으하하하하하"
나는 우리를 가지고 싶었어. 내 것이라는 것도 가지고 싶었지. 내 가족, 친구 손에서 놓칠 수 없는 놓쳐버리지 않을 영원을 꿈꾸는 사랑. 그런데 그런게 있을 리가 없잖아. 포기했어. 순간만을 기억하기로 순간은 영원하니까. 순간은 아름다워. 그게 뭐든. 그게 어떤 방법으로 어떤 행동을 하든. 순간만큼은 아름답다고 생각해. 왜 나는 애희가 우리를 만들 수 없었을까. 내가 원하지 않았는 지 애희가 원하지 않았는 지는 모르겟어. 하지만 나는 나와는 가지지 못한 우리를 애희에게 만들어 주고 싶어. 나와 함께 영원할 수 없었던 애희의 우리를 애희가 좋아하는 네가 함께 한다면 나는 그 순간을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은 평생을 가도 모르겠지. 당신 말대로 나는 누나를 사랑할 수 있었어. 아니 당신의 순간을 위해 나를 조정하지 않았다면 아니 당신이 스쳐지나가는 말로라도 당신의 애인을 사랑해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을 지도 몰라. 당신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그녀를.
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어. 당신의 저주는 당신이 그 말을 입에 담았을 때부터 나에게 그녀를 사랑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렸으니까. 온전하지 않아. 완전히 그녀를 사랑할 수 없지 불온하게도 항상 그녀와 함께 당신을 떠올릴테니까. 그러니까 그녀는 당신도 나도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해. 그래야만 해. 그래야만 그녀의 순간도 영원도 모두 온전히 그녀의 것이 될꺼야.
그러니까 당신은 나와 살아. 내 곁에 있어. 당신이 정말 애희누나의 행복을 바란다면. 그리고 당신의 저주도 풀고 싶다면 당신은 나와 같이 순간을 보내. 그리고 가. 영원히 사라져 버려. 그럼당신은 온전히 우리를 가질 수 있게 돼지.
그럼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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